야구 해설가, 그들은 누구인가?

스포츠 2006.09.14 14:27 Posted by soulfree >동네청년<
야구 해설가, 그들은 누구인가?
[스포츠2.0 2006-09-13 20:01]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베이스볼 아나운서 윤길구입니다. 지금부터 경기중학과 동산중학의 게임을 전국에 방송해 드리겠습니다. 생각하면 서글펐던 36년. 압제와 질곡의 36년을 털어 버리고 해방의 감격을 맞은 지도 벌써 1년 1개월. 일제의 간악한 마수가 우리 손에서 빼앗아 가버린 마이크를 되찾은 지도 어언 13개월. 이제 이 은총의 순간을 맞아 경건한 마이크 앞에 다시 서니 한줄기 감회와 함께 무한한 희망이 가슴에 용솟음칩니다. 오늘 이 중계를 시작으로 앞으로는 자주 여러분을 위한 스포츠 중계를 해 드리기로 약속 올립니다. 제1회 전국중등학교야구선수권대회 준준결승전이 벌어지고 있는 이곳 경성 스타디움에는 때마침 일요일을 맞아 외야 언덕에까지 입추의 여지없는 대관중이 들어찼습니다.”
/윤길구 아나운서(가운데)는 해방 뒤 최초의 야구 중계를 맡은 역사적인 방송인이다.(한국스포츠사진연구소)

- 조선방송협회 서울중앙방송국 윤길구 아나운서, 1946년 9월 15일 -

원로 스포츠기자 조동표는 “해방 전에도 야구 중계는 있었다. 그러나 해설가는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말한다. 한국에서 최초로 방송 중계된 야구 경기는 1927년 9월 열린 경성실업야구연맹전이다. 그해 2월 16일 개국한 국내 최초의 방송국인 경성방송국(호출부호 JODK)은 이 대회를 유선으로 중계했다. 중계 횟수가 1929년 6월까지 13회, 1930년 4~10월에 70회였으니 인기 종목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당시 성인야구나 고교야구의 주역은 일본인이었다. ‘한국의 베이브 루스’ 이영민과 강속구 투수 오윤환 등이 활약하기도 했지만 예외일 뿐이었다. 일제시대 성인야구팀에는 일본대학야구 최고봉인 6대학 리그 출신 선수들도 많았다. ‘식민지 근무 수당’이 붙은 조선 근무가 매력적이었기 때문이다. 스포츠에 국경은 없다지만 ‘일본인들을 위한 경기’에 한국인들의 관심이 컸을 리 없었다.

학생야구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1915년부터 열린 전국중등학교 우승야구대회(현 고시엔대회)에 조선학교도 출전할 수 있었지만 매번 1, 2회전에서 탈락하는 전력이었다. 그나마 본선 출전교 대부분은 일본인학교였다. 한국인팀으로 가장 좋은 성적은 1923년 휘문고보(현 휘문고교)가 기록한 8강(1차전 부전승, 2차전 만주대표 대련상업에 9-4 승리)이다. 이 대회에 우익수로 출전했던 이순재 전 대한체육회 총무이사는 “그때는 고시엔구장이 지어지기 전이라 나루오(鳴尾) 구장에서 대회가 열렸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해설가 1세대

해방 뒤 최초의 야구 중계는 1946년 9월 청룡기 전국중등학교선수권대회다. 조선방송협회 서울중앙방송국(현 한국방송공사 KBS)이 라디오로 대회 5일째인 9월 15일 경기중학(현 경기고교)과 동산중학의 준준결승 마지막 경기를 중계했다. 뒷날 ‘아시아의 철인’으로 이름을 날린 박현식 삼미 슈퍼스타스 초대 감독이 동산중 선발, 일제 시대 맥이 끊겼던 경기고 야구부를 부활시킨 주역 김영제가 상대 선발이었다.

지난 2001년 ‘방송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윤길구 아나운서가 해방 뒤 첫 야구 중계에서 마이크를 잡았다. 첫 야구 중계이자 첫 스포츠 중계였다. 그러나 당시 윤아나운서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나운서 혼자 경기를 책임지는 단독 중계였다.

1954년 12월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제1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는 한국야구가 최초로 치른 국제 대회다. 최초로 해외에서 생중계된 야구 경기기도 하다. 마이크를 잡은 아나운서는 윤길구와 황우겸. 지금으로 치면 한명이 캐스터, 다른 한명이 해설가 역할을 맡았다. 황우겸은 1946년 윤길구가 해방 뒤 첫 야구 중계를 했던 경기에서 동산중 선수로 뛰었으니 묘한 인연이었다. 그는 1951년 중앙방송국에 입사했다.

/고교야구의 인기는 야구 해설가라는 직업을 낳은 원동력이었다.(한국스포츠사진연구소)

그때는 ‘야구 해설’이라는 장르 자체의 의미가 희박했다. 아나운서가 경기 상황을 라디오 청취자들에게 단순 전달하는 게 초창기 야구 중계 방식이었다. KBS SKY의 유수호 아나운서는 1969년 동양방송(TBC)에 입사해 1970년부터 야구 중계를 시작했다. 유아나운서는 “야구는 축구나 농구와는 달리 쉬는 시간이 많은 경기다. 이 때문에 아나운서를 보조할 해설가가 필요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최초의 야구 해설가는 연세대 감독을 지낸 손희준으로 알려져 있다. 손희준은 1946년 조선야구협회(현 대한야구협회) 창설 때 발기인으로 참여한 인물이다. 삼성 라이온즈 김응용 사장에게 ‘코끼리’라는 별명을 지어준 사람이 그다. 1942~1944년 일본프로야구 한큐 브레이브스에서 포수로 38경기에 뛴 유완식도 해설가 1세대에 속한다. 그는 1964년 경기도 전국체육대회 때 동아방송(DBS) 해설가로 처음 마이크를 잡았다.

당시에는 지금과 같은 전속 해설가는 없었다. 방송국 PD와 안면이 있는 인사가 그때그때 투입되는 식이었다. 예를 들면 1962년 자유중국(대만)에서 열린 제4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때는 야구협회 허곤 이사가 해설가로 기용했다. 캐스터는 KBS 박종세 아나운서. 박아나운서는 1961년 5?16 쿠데타 때 ‘혁명공약’을 방송했던 사람이다.

이 무렵 해설의 전문성은 떨어질 수 밖에 없었다. 유완식은 동산고가 대구상고에 극적인 역전승을 거둔 1966년 청룡기 결승전 때 “동산고가 우승할 줄 알았던 사람은 하느님뿐일 것”이라는 마무리 코멘트를 했다. 유완식은 1997년 <스포츠서울> 이종남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해설도 공부하고 훈련해야 하는 것인데 무조건 마이크만 잡았다”며 자책했다.

<한국일보>의 장기영 사장은 1958년 메이저리그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구단을 초청한다는 파격적인 구상을 했다. 당시 한국일보의 유일한 체육 기자였던 조동표는 8월 7일 자 신문에 카디널스를 소개하는 기사를 실었다. 언론사에서도 등 텔렉스로 수신하던 통신사 기사를 제외하면 해외 주둔 미군들에게 배포되던 <성조지>가 거의 유일한 ‘외신’인 시절이었다.

조동표는 미국 유학 경험이 있는 서울대 모 교수를 찾아가 세인트루이스 팀에 대한 취재를 했다는 후문이다. 실은 이 교수도 내셔널리그 팀이 없는 도시에서 유학을 해 카디널스의 경기를 한번도 보지 못했다. 1960년대 한 방송국 아나운서가 고교대회 중계 도중 모교에 대한 사랑을 이기지 못하고 “우리 **고가 이겼습니다”라고 말해 자리에서 물러난 웃지 못할 일화도 있다.

고교야구와 전속 해설가

최초의 전속 해설가는 1965년부터 TBC 해설위원으로 활약한 서동준이다. 서동준은 1953, 54년 인천고가 청룡기대회에서 2연속 우승할 때 주역이었다. 그는 최초의 전후 야구 스타로 손꼽힌다. 첫 해외 야구 중계 방송이 이뤄진 1954년 마닐라 아시아선수권대회 때는 고교 3년생으로 태극마크를 달았다. 당시 대표팀의 주력 투수는 나중에 해설가로 데뷔하는 유완식을 비롯해 김양중과 박현식 3명이었다. 홍안의 서동준은 자유중국(대만)과의 3차전에 등판해 승리를 따내지는 못했지만 6이닝 2실점(1실점)으로 호투해 한국야구 최초의 국제대회 승리(4-2)의 주역이 됐다. TBC 아나운서로 서동준과 호흡을 맞췄던 유수호는 그의 해설에 대해 “명투수 출신이라 타자와의 승부를 설명하는 데 능했다. 그라운드에서 뛰는 선수들의 감정을 시청자들에게 전달하는 해설이 인상적이었다”고 평했다.

전속 해설가의 등장은 민영 방송의 탄생과 맞물려 있다. TBC는 1964년 5월 라디오 방송으로 출범해 그해 12월 최초의 민영 텔레비전 방송인 TBC-TV를 개국했다. 고교야구가 국민적인 스포츠로 자리잡던 시기였다. 유아나운서는 “당시는 방송 시간에 제한이 있던 때였다. 그래도 고교야구 준결승, 결승전은 낮경기 방송이 허가됐다. 워낙 인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결승전은 예외없이 관중들로 가득 찼으며, 시청률은 30%대를 웃돌았다”고 말했다.

/1962년 대만에서 열린 제4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때는 박종세 아나운서(앞줄 오른쪽)가 캐스터, 허곤 대한야구협회 이사(앞줄 왼쪽)가 해설을 맡았다.(한국스포츠사진연구소)

라이벌인 DBS는 한국전력 감독을 지낸 김계현을 전속 해설가로 영입해 맞불을 놓았다. 서동준이 최초의 TV 전속 해설가였다면 김계현은 최초의 라디오 전속 해설가였다. 그는 마산상고를 수석으로 졸업한 당대의 인재였다. 별명은 ‘한국의 미즈하라 시게루’였다.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장훈이 뛰었던 도에이 플라이어스의 감독을 지낸 당대 일본프로야구 명장과 비견됐다. 경남 마산 출신인 그의 해설은 신사다운 성품답게 조용조용했으며 냉철했다고 한다.

서동준과 김계현의 등장은 야구가 산업화된 방송과 결합된 초기 모습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해설가는 직업이라기 보다는 명예직에 가까웠다. 서동준은 “처음 받은 전속 해설료가 월 7천 원 정도였다. 지금 돈으로는 20만 원 정도일 것”이라고 회상했다.

풍규명, 이호헌도 고교야구 시대를 주름 잡았던 해설가다. 본명인 이정렬인 이호헌은 대한야구협회 공식기록원으로 처음으로 야구표준기록을 도입했고, 실업연맹 사무국장 시절 페넌트레이스 제도를 들여 온 야구 행정의 선구자다. 그는 뒷날 이용일 전 한국야구위원회(KBO) 사무총장과 함께 프로야구 창설을 주도했다. 당시로서는 드문 체계적이고 이론적인 해설이 특징이었다. 중고야구연맹 사무국장을 지낸 풍규명은 1980년대 스타 외야수 이해창의 장인이다. 술을 즐겼던 호인으로 중계 방송 때는 반드시 소주 반 병을 마셨다고 한다. 적당히 얼큰해진 얼굴로 “선린상고에는 김씨가 5명 있습니다. 신일고 선수들의 성은 제각각이군요. 김씨들이 단합해 ‘각성바지’ 신일고를 물리치지 않을까요”라고 선수 소개를 했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스타일은 다소 달랐지만 풍규명도 이호헌처럼 서울시 고교연맹 공식 기록원으로 일했다. 이들은 기록에 기반한 해설로 신선함을 불러 일으켰다.

야구 기록의 개념조차 정립되지 않은 시절 야구 중계에 기록을 활용한다는 발상 자체가 신선했다. 한 대회를 치르면서도 선수들의 누적 기록은 아나운서나 기자들이 ‘알아서’ 했던 시절이었다. 유수호는 “요즘 해설이 분석적이라면 과거 해설은 감성적이었다”고 평가했다. 서동준은 “당시 해설가들은 비판적이었다. 경기를 잘못 한 감독이나 선수를 질타하는 식의 해설을 자주 했다. 방송국에서도 기술적인 설명을 크게 요구하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해설가가 감독을 물러나게 할 수 있다’는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조해연, 김병우, 장철현, 박상규 등도 이 시기 해설가로 활약했다.

군사 정권 시절 고교야구 중계도 검열 대상이었다. TV 중계가 가능한 요일과 시간대도 정해져 있었다. “지역색을 드러내는 발언을 하지 말라”는 중앙정보부의 지침이 중계석에까지 내려와 있었다. 서동준은 “각서에 도장도 여러 번 찍었다”고 회상했다. 그래서 군산상고와 경북고가 결승전을 벌여도 아나운서나 해설가는 ‘영남’ ‘호남’이라는 단어를 쓰지 못했다. 서동준이 물러난 뒤 TBC가 후임 해설가를 찾을 때 첫번째로 든 기준이 ‘경상도, 전라도 사투리를 쓰지 않는 사람’이었을 정도다.

스타 해설가 김동엽

197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 아마도 최초일 ‘스타 해설가’가 등장한다. ‘빨간 장갑의 마술사’로 불렸던 김동엽 전 해태 타이거즈 감독이다. 김동엽은 자서전 제목인 <그래, 짤라라 짤라>처럼 감독직에서 해임되는 게 트레이드 마크였다. 그는 1978년 성균관대 감독직에서 물러난 뒤 TBC에서 해설을 맡았다. 시청자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시원시원하고 거침없는 언변이 그의 특징이었다.

하일성 KBO 사무총장은 “격투기로 치면 이론에 강했던 이호헌 씨는 태권도식 해설을 했다. 김동엽 씨는 막싸움 스타일이었다”며 “1988년이었던가, 김동엽 씨가 ‘말을 조리있게 하되 해설을 공격적으로 하라. 승부를 건다는 심정으로 과감하게 경기를 예상하라’고 조언했다. 그 뒤 내 해설 스타일이 변했다”고 말했다.

/1958년 8월 7일자 <한국일보>에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방한 소식이 크게 실려 있다.(한국스포츠사진연구소)

그는 얼마 뒤 KBS로 자리를 옮겼다. KBS는 그에게 월 30만 원의 급여를 보장했는데 당시 KBS 10년차 기자 급여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TBC 시절 급여는 월 12만원이었다. 한국 방송사와 야구사를 통틀어 최초의 ‘해설가 스카우트 파동’이었던 셈. 야구의 인기 상승과 더불어 해설가의 지위도 그만큼 올랐던 것이다.

김동엽은 야구계에서 기인으로 알려졌으며 아마추어 시절부터 혹독한 훈련으로 선수들과 갈등을 빚었다. 1968년 대한체육회 코치 아카데미 수료를 평생의 자랑으로 삼았고, 1979년에는 40살의 나이에 한양대 3학년에 편입한 열정을 갖고 있었다. 그는 1987년 MBC 청룡을 끝으로 감독 일선에서 물러났고, 선수들의 병역 관련 발언이 문제가 돼 1994년 서울방송(SBS)에서 마이크까지 놓았다. 1997년 동부이촌동 자택에서 변사체로 발견돼 주위 사람들을 가슴 아프게 했다. 야구사에서 명장은 많았지만 팬들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아는 감독은 드물었다는 점에서 김동엽은 쉽게 잊혀지지 말아야 할 사람이다.

하일성과 허구연

1982년 프로야구의 출범은 야구 중계를 변모시켰다. 유수호는 “지난해 한국시리즈 시청률이 12%를 넘기자 방송계에서는 ‘대박’이라고 했다. 그러나 1980년대에는 페넌트레이스 경기 시청률이 8~12%를 상회했다”고 말했다. 지금 지상파 프로야구 중계 시청률은 3%를 좀체 넘지 못한다.

프로야구 출범과 함께 떠오른 해설가가 바로 KBS의 하일성과 MBC의 허구연이다. 하일성은 환일고 체육교사 시절인 1979년 TBC에서 방송 해설을 시작했다. 유수호는 “서동준 씨 후임이 마땅찮던 차에 배구 해설가 오관영 씨가 하일성 씨를 추천했다”고 말했다. 성동고 시절 유격수로 활약했지만 야구계에서는 당시까지 무명이었다. 마당발로 통했던 풍규명 정도가 하일성이라는 사람을 알아봤을 정도였다.

하일성과 허구연은 1980년대 이후 오랫동안 야구 해설계를 양분했다. ‘친화력의 하일성’과 ‘이론의 허구연’은 팬들이 두 사람을 나누는 방식이다. 야구를 알기 쉽고 재미있게 전달하는 데는 아직 하일성을 따를 해설가가 드물다는 게 방송계의 평가다. 그러나 초창기 하일성은 ‘전문적인 해설’로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이전까지 해설가들은 직업을 따로 갖고 해설을 겸업했다. 서동준의 경우도 해설을 그만 둔 이유가 한일은행 지점장으로 영전해 겸업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기억력이 뛰어난 하일성은 야구 규칙을 외우다시피 하며 해설을 준비했다. 야수선택이나 스트라이크아웃 낫아웃 규정을 야구 규칙 몇 조 몇 항까지를 들어가며 설명한 첫 해설가가 하일성이다.

프로야구는 고교야구와는 달리 장기 페넌트레이스를 펼친다. 5공화국 시절이라 정책적으로 TV의 프로야구 편성도 잦았다. 시청자들과의 접촉이 많아지다 보니 인기 해설가는 방송 시청률을 좌우할 수도 있게 됐다. 인기 해설가들의 등장은 아나운서 중심 중계가 해설가 중심 중계로 변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언론 종사자인 아나운서는 ‘사실 전달’이 우선이다. 초창기 야구 중계 때는 “아나운서는 절대 흥분하면 안 된다. 상황 전달에 충실해야 한다”라는 격언도 있었다. 그러나 라디오에서 TV 시대로 접어들며 ‘사실 전달’의 비중은 줄어들게 됐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하일성을 ‘TV 시대에 가장 어울리는 해설가’로 꼽는다. 하일성은 이를 ‘시청자들의 상상력을 불러 일으키는 해설’로 설명한다.

스타일은 다르지만 허구연도 하일성처럼 이전 해설가들과는 달랐다. 그는 고려대에서 4번타자를 지냈고 법학전공 학사 학위를 받은 경력의 소유자다. 뒷날 프로야구 감독과 코치, 미국 마이너리그 팀의 코치 경험까지 더해 야구계에서 가장 다채로운 경험을 한 사람으로도 꼽힌다.

/KBS의 전신인 서울중앙방송국(호출부호 HLKA)의 야구 중계 방송 장면.(한국스포츠사진연구소)

방송 해설가로서 허구연이 갖는 의미는 한국야구의 변화 발전 과정과 닿아 있다. 공식적인 ‘한국야구의 아버지’는 미국인 선교사 필립 L. 질레트다. 그러나 야구의 틀이 잡힌 때는 일제 시대다. 1960년 출범한 실업야구는 여러 은행들이 주축이 됐는데 일제 시대 금융기관에서 성인야구팀을 운영했던 전통과 무관치 않다. 프로야구 출범 뒤인 1985년 삼성이 LA 다저스의 스프링캠프인 베로비치 다저타운을 방문한 것을 시작으로 한국야구는 본격적으로 미국야구를 받아들였다. 허구연은 삼성보다 1년 앞선 1984년 문화방송 해설위원으로 다저 타운을 찾은 인물이다. 1987년 청보 핀토스 감독에서 물러난 뒤인 1990년에는 토론토 블루제이스 유급 순회코치로 뛰기도 했다.

방송 초기 허구연은 ‘베이스 온 볼스’ ‘히트 바이 피치’ ‘브레이킹 볼’ 등 미국식 용어를 자주 이용해 언론들로부터 질타를 받기도 했다. 허구연은 “공사판에서 일본말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의식적인 노력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 야구장에서는 일본식 용어가 많이 사라졌다”고 말했다. 그는 야구 용어 정비를 해설 활동의 가장 큰 보람으로 삼고 있다. 이전과 달리 감독이나 선수를 질타하는 ‘비판적 해설’이 줄어든 것도 허구연의 영향으로 꼽힌다.

그는 TBC를 거쳐 1982년 31살에 MBC 전속 해설위원이 됐다. 이 계약은 사상 최초의 해설가 연봉 계약이었다. 원래 허구연은 2,200만 원을 요구했는데 당시 KBO가 정한 박철순, 김봉연 등 특급 선수들의 연봉과도 같은 액수였다. 그의 논리는 “훌륭한 해설을 위해서는 방송국이 투자를 해야 한다”였다. 지금도 “후배 해설가들이 해설에만 전념할 환경이 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After…

2006년 KBO 야구 수첩에 등재된 각 방송사 전속 해설 위원은 이용철(KBS) 허구연(MBC) 박노준(SBS) 윤정현(PBC) 이길환(원음방송) 김용수(KBS SKY) 양상문, 한만정(이상 MBC ESPN) 김광철, 강태정, 이광권, 김상훈(이상 SBS 스포츠) 등이다. 지역 방송에서는 올해 5월 1천 경기 연속 중계 기록을 세운 이성득(KNN), 배대웅(대구방송) 등이 활약하고 있다. 여기에 경기마다 수당을 받는 비전속 해설가들까지 포함하면 그 수는 훨씬 늘어난다. 하지만 아직 해설가협회 등의 모임은 없다. 급여는 대다수가 3천만~5천만 원대다.

국내에 메이저리그가 중계됨에 따라 송재우, 이종률 등 비야구인 출신 해설가, 현직 기자 해설가도 등장했다. 이들은 실전 경험은 없지만 경기인 출신들이 약한 풍부한 해외야구 정보가 강점이다. 하일성은 “시청자들에게 야구라는 경기를 다양한 측면에서 보여줘야 한다. 비야구인 출신 해설가들의 등장은 그래서 반가운 일”이라고 말했다.

최민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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